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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

기리시탄과 조선 천주교의 시작

by 서툰키스 2025.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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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시탄에서 시작된 이야기: 조선과 천주교, 그 500년의 여정

 

“십자가를 등에 지고 전장을 건넌 이들이 있었다.”


16세기 말, 조선에 처음 등장한 천주교는 그렇게 낯선 모습이었다.


갑옷 위로 걸친 목걸이, 전투 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일본 병사들.

 

그들을 사람들은 ‘기리시탄’이라 불렀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조선과 천주교의 관계는, 뜻밖에도 복잡하고도 긴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1. 기리시탄, 일본 땅에 싹튼 낯선 신앙

1549년,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하면서 천주교가 일본에 전파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서양 종교를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이라 불렀고, 이 발음은 영어의 ‘크리스천(Christian)’에서 유래했다.

 

처음엔 무역의 이익과 함께 들어온 천주교는 의외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일부 **다이묘(영주)**들은 총기와

 

무역로 확보를 위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그 아래 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개종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그는 훗날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장

 

수였으며, 렬한 기리시탄이었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불안과 기리시단의 운명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리시탄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어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자신보다 신을 더 섬기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같은 외국 세력과 연계

 

될 수 있는 기리시단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1587년, 그는 결국 기리시탄 추방령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무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탄압하면서도 전쟁에는

 

그들을 적극 활용하게 된다.


3. 임진왜란: 기리시탄, 조선 땅에 들어서다

1592년,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이때 기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제1군 선봉장으로 조선에 들어온다.

 

그의 부대는 기리시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심지어 선교사, 통역사, 수녀까지 동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인들에게 이들은 너무나 낯설고도 충격적인 존재였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병사들.

 

이국적인 복장, 이상한 말, 그리고 신을 부르는 행동.

 

기리시탄은 조선인들에게 전쟁의 공포와 더불어 처음 접하는 서양 종교의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이 조선에 천주교를 직접 전파했다는 증거는 없다.

 

일부 포로가 일본에 끌려가 세례를 받았다는 주장은 있지만, 이들이 돌아와 신앙을 전한 흔적은 없기 때문

 

다.


4. 조선에서의 천주교, 뜻밖의 시작

기리시탄과는 별개로, 조선의 천주교는 전혀 다른 경로로 전해진다.

 

17~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은 **중국을 오가며 서양 학문(서학, 西學)**을 접하게 된다.

 

그 속에는 수학, 천문학, 지리학, 그리고 천주실의(天主實義) 같은 천주교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서적을 읽은 조선의 유학자들, 특히 남인 계열의 학자들은 천주교의 교리에 감탄하게 된다.

"하늘의 주(天主)가 인간을 창조했고,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개념은 신분제 사회에 강한 충격이었다.


5. 조선 천주교의 자생적 출발

그리고 1784년,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다.

 

조선의 젊은 유학자 이승훈청나라 연행길에 올랐다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조선 최초의 공식 세례자, 즉 한국 천주교의 첫 신자다.

 

이승훈은 귀국 후 정약용의 형 정약종, 친구 권일신 등과 함께 자생적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놀라운 것은, 선교사 없이 시작된 유일한 천주교 공동체라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는 해외 선교사가 아닌, 책과 신앙만으로 시작된 신앙이었다.


6. 박해와 순교, 그리고 생명력

하지만 이 낯선 신앙은 곧 조선의 유교적 질서에 반하는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했고, 조상 숭배를 부정했다.

 

이는 곧 조선의 가족제도와 유교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수차례 대대적인 박해가 이어졌고,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대표적인 박해는 다음과 같다.

 

● 신해박해 (1791년)

 

조선 천주교의 첫 공식 박해.

 

정약용의 사촌 형 윤지충권상연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교했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 천주교의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 신유박해 (1801년)

 

가장 규모가 컸던 박해 중 하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남인 세력과 천주교를 동시에 탄압했다.

 

이때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등 초기 신자들이 순교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도 유배를 당했다.

 

● 병인박해 (1866년)

 

가장 잔혹하고 격렬했던 박해.

 

대원군 집권기에 외세와 연결되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수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병인양요가 발발했다.

 

이렇듯 천주교는 조선 사회에서 끊임없이 탄압과 순교를 겪었지만, 그 안에서도 신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

 

다.

 

대표적인 순교자에는 정약종, 그리고 후에 한국 최초의 성인으로 추대된 김대건 신부 등이 있다.


7. 오늘날의 한국 천주교

그렇게 피와 신앙으로 지켜온 천주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깊이 내렸다.

  • 1831년, 조선대목구가 공식 설정되고
  • 1845년,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가 서품을 받았으며
  • 1984년, 한국 천주교는 **김대건 신부와 102명의 순교자를 시성(성인으로 추대)**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현재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천주교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며,

 

신앙으로 살아남은 공동체의 표본으로 불린다.


마무리하며

처음 조선 땅을 밟은 천주교는, 사실 기리시탄의 칼과 방패 뒤에 숨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진짜 천주교는 책을 읽고, 믿음을 공부한 조선의 젊은 유학자들에 의해 태어났다.

 

전장에서 피로 물든 신앙이 아닌,

 

사색과 고뇌로 가꿔진 믿음.

 

그것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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