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린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어느 날 문득, 아들과 딸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생생하게 뛰어놀고, 웃고, 울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몇 년 뒤엔 아이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그렇다.
7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긴 하다.
어디선가 울고 있었던 나, 할머니 품에서 잠이 들었던 순간, 병원에서 주사 맞고 펑펑 울던 장면 같은 것들.
그마저도 내가 겪은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다.
사진이나 가족의 이야기 속에서 자주 반복되었기에, 어느새 머릿속에 ‘기억’처럼 자리 잡은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다.
–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까?
1. 뇌는 아직 덜 자라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뇌에는 기억을 저장하고 꺼내는 역할을 하는 부위가 있다.
해마(hippocampus), 그리고 전두엽(frontal lobe).
이 두 곳은 특히 장기 기억을 다루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구조들이 3~5세 무렵까지는 제대로 성숙하지 않은 상태다.
마치 촬영 버튼이 있지만 녹화는 되지 않는 카메라처럼, 눈앞의 장면은 보고 있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는 시기인 것이다.
아이들은 분명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반응한다.
하지만 그 경험이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 남아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2. 말을 하기 전의 기억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억은 단순히 장면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 기억을 ‘이야기’로 엮어야, 나중에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말을 배우기 전의 우리는 세상을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엄마의 미소, 아빠의 손, 따뜻한 이불 같은 것들은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이었지,
“사랑”, “안전함”, “포근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어가 발달하기 전의 기억들은, 머릿속 어딘가엔 남아 있어도 꺼내기 어렵다.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순간들은, 그냥 흐릿한 감정의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3. 아직 '나'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기억을 떠올릴 때 우리는 늘 “내가 그랬지”라는 관점으로 되짚는다.
그런데 아주 어린 시절엔, 자아, 즉 ‘나’라는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심리학자들은 보통 3~5세 즈음부터 아이들이 “내가 누구인지”, “이건 내 것”,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의 자아 인식을 갖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 이전까지의 시간은 나라는 경계가 흐릿했던 시기였다.
세상과 나 사이에 경계선이 없었고, 감정은 곧 환경이었으며, 생각은 감정과 뒤엉켜 있었다.
그 시절은 나로서 살아온 시간이 아니라,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흘러간 시간이었다.
‘나’라는 뚜렷한 화자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를,
과연 지금의 내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4. 기억은 사라졌을까, 아니면 잠들어 있을까
우리가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경험들이 우리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시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 깊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아주 오래된 냄새를 맡았을 때,
아무 의미 없던 멜로디 한 조각이 귀에 들어왔을 때,
무심코 들여다본 오래된 사진 속 풍경이 낯익게 느껴질 때,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나 따뜻함이 밀려온 적 있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른다. 말이 되지 못한 기억,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감정들이
잠시 얼굴을 내미는 순간일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기억이 없는 것은 다르다.
우리의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 느꼈던 외로움, 기쁨, 두려움, 위로…
그 모든 감정은 오늘의 나를 빚어내는 데 어딘가 쓰였을 것이다.
5. 아이들을 바라보며, 잊힌 나를 떠올리다
나는 가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지금 저 아이가 느끼는 기쁨은 몇 년 뒤 기억나지 않겠지만,
그 감정의 잔향은 평생을 따라다니리라.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 품에 안겨 울던 순간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품이 안전하고 따뜻했다는 느낌은
아마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 뿌리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지금의 우리가 된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의 지금을 더 소중히 바라보게 된다.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 순간이 의미 없지는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 이 순간이, 말없이 아이의 마음속에 쌓여가는 것임을 믿는다.
6. 내 기억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살면서 우리는 종종 과거를 왜곡한다.
가끔은 너무 아름답게, 때론 너무 아프게.
그러나 그 왜곡조차 ‘현재의 나’를 위한 작업일지 모른다.
기억이란 건 어쩌면, 과거의 사실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지탱하기 위한 이야기 재료가 아닐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흐릿하다는 것은,
그 시절이 덜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서 꺼낼 필요조차 없었던 감정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7. 잊었다고 해서 없던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안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 속에도, 나는 존재했다는 걸.
누군가의 품에서 안긴 채 잠들었고,
누군가의 웃음 속에서 나도 함께 웃었고,
누군가의 마음을 몰래 두드리며 나는 나대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지금의 나는,
그 모든 잊힌 순간들로 만들어졌고,
기억할 수 없기에 더 순수하게, 그 시간을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들아, 딸아.
너희가 지금 이렇게 웃고 울고 살아가는 이 순간들이
언젠가 너희 기억에서 흐릿해지더라도,
그 감정 하나하나는 분명히 너희 안에 남을 거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을 테니까.
너희가 어른이 되어서,
그 이유 없는 포근함이나,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면,
그건 아마 지금 이 순간을 닮은 감정일 거야.
그땐 꼭 말해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마음은 기억하고 있어.”
그 말 한마디로,
우리는 서로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