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나의 생각

서툰키스 2025. 5. 1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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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 오래된 물음과 오늘의 시선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했을 때, 혹은 아주 낯선 이에게 예상치 못한 친절을 받았을 때.
“사람이 원래 이런 걸까? 아니면… 어떤 계기로 이렇게 된 걸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시작부터 어떤 본성을 갖고 있을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마음’이 먼저일까?

이 질문은 철학의 뿌리처럼 깊다.
가장 오래된 논쟁 중 하나이자, 지금도 여전히 삶 속에서 되새기게 되는 질문이다.
오늘, 나는 그 질문 앞에 조용히 앉아본다.


성선설과성악설 책의 펼쳐진장면

 

🌱 성선설 — 본래의 우리는 선하다는 믿음

 

“사람은 누구나 선하게 태어난다.”

맹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네 가지 마음이 본래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

이 네 가지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선한 씨앗이다. 잘 자라게 하면 누구나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은 단지 철학이 아니다. 그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왕도정치’, 즉 인의로 다스리는 정치를 옹호하고자 이 이론을 펼쳤다.
그의 철학에는 분명한 정치적 이상주의가 있었다. 백성을 억압하지 말고, 선한 본성을 북돋워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여기서 유가(儒家)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엿볼 수 있다. 유가는 이상적인 군주, 도덕적 인간상을 통해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때 성선설은 유가의 핵심 철학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도덕적 수양과 교육을 통해 누구든 군자(君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다.

 

👉 즉, 성선설은 유가의 이상적 질서와 교육 중심 통치의 철학적 기반이었다.


🔥 성악설 — 선은 노력의 산물이라는 현실 인식

 

반대로 순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그러나 배움과 규범을 통해 선해질 수 있다.”

순자는 인간이 욕망을 따라 행동한다고 보았다. 먹고 싶고, 갖고 싶고, 이기고 싶고, 높아지고 싶은 본능은 끝이 없다.
이 욕망이 절제되지 않으면 다툼과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예(禮)가 필요하다.

예는 규범이고 제도다. 인간을 길들이고, 공존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순자의 제자들은 후에 법가(法家) 사상의 초석이 된다. 법가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강력한 법과 처벌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성악설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실용적 이념이었다.
질서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제 조건.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통제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법가의 입장에서는 성악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전제가 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므로, 공감이나 도덕보다는 명확한 보상과 처벌 체계, 감시와 통제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비자나 상앙 같은 법가 사상가들은 실제로 군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백성을 믿지 말고, 법을 믿으십시오. 법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시시때때로 바뀝니다."

 

👉 즉, 법가에게 성악설은 권력을 유지하고 법치를 정당화하는 실천 철학이었다.


🤔 철학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쯤 되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철학은 순수한 진리를 향한 사유였을까? 아니면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였을까?

맹자의 성선설은 도덕 정치의 근거가 되었고, 순자의 성악설은 법치 국가의 논리적 토대가 되었다.

  • 이상을 꿈꾸는 자는 성선설을 말했고,
  • 질서를 원하는 자는 성악설을 선택했다.

철학은 때로 진리를 탐구했지만, 동시에 시대의 욕망을 반영했다.
철학도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가는 혼란한 시대에 도덕과 교육을 통한 이상 사회를 꿈꾸었고, 법가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효율적인 통치와 권력 유지를 지향했다.

따라서 성선설과 성악설은 단지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자들이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인간은 한쪽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까?

 

한쪽은 “인간은 원래 착하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인간은 원래 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어떤 날에는 길에서 쓰러진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어떤 날에는 뒤처진 이를 모른 척 지나친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도, 때로는 뻔뻔하게 변명하는 마음도 함께 가진다.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선도 악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듬고, 경계하며 살아간다.


💬 오늘, 우리가 진짜 궁금한 것

 

이 철학을 논하며 결국 우리가 묻고 싶은 건 이것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사람은 본래 믿어도 되는 존재일까?”

그 물음은 본성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삶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깃든 질문이다.


🌿 선함은 본성일까, 선택일까?

 

나는 이렇게 믿는다.
선함이 본성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선함이 선택이라면, 우리는 매일 그 선택을 해야 한다.

결국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중요한 건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밀어주는가이다.


🪞철학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맹자와 순자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가졌지만, 그 둘 모두 사람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는 사람 안의 씨앗을 키우는 길,
다른 하나는 사람 바깥의 울타리를 세우는 길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그 둘 사이를 오간다. 내 안의 본성은 무엇인지, 그 본성을 지킬 수 있을지, 혹은 법과 규범으로만 유지되는 것인지.

그렇기에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질문이다.

그리고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철학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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